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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점(黑點)

 

한사코 뿌리치는

너의 어지럼증엔

무언가 있지, 싶은

가을날 해거름 녘

비밀리

자라고 있다던

뇌하수체

꽈리 하나

좁아진 시야만큼

햇빛도 일렁인다며

태양의 밀도 속에

움츠러든 코로나처럼

궤도를

이탈하는 중

너는, 늘

오리무중

 

 

 

 

 

◇ 당선소감

 

이나영

1992년 대구 출생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재학

2013년 중앙시조백일장, 제14회 전국가사시조창작공모전 입선

 

언어의 우물에 시조의 두레박을

 

대학교 3년 동안 철없고 덜 여문 나날들을 영글게 해준 것이 제겐 시조였습니다. 어떤 궤도로 진입해야 할지 방황하고 있던 저에게 궤도를 이탈하지 않도록 길을 잡아주는 나침반이었지요. 스물둘, 초록의 날을 고스란히 바치며 시조 한 수 한 수를 열매로 달기 위해 두근거리는 언어들을 품어왔습니다. 왜 하필 시조냐며 자꾸만 다른 안테나를 들이밀던 세상의 말들에도, 꿋꿋이 타자기를 두들겼던 보람이 이렇게 꽃핍니다.

시조의 운율 속에 내 마음결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 고등학교 시절이었지요. 그때부터 시조의 행간을 오가며 어설픈 발걸음으로나마 지금까지 걸어왔습니다. 내게 평안과 힘을 가져다주는 이 길이 언젠가는 다른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희망을 줄 수 있는 길이기를 믿습니다. 성공과 취업이라는 단어에 짓눌려 그늘진 젊음의 시간을 시조가 구원해 주었듯이 그들에게도 따스한 위안이 되고 한 줄기 빛을 내어줄 수 있는 시인이기를 원합니다.

아직은 들끓는 태양의 운동처럼 들쑥날쑥하지만 살아 있는 언어의 우물에 시조를 길어 올릴 두레박을 힘껏 던집니다. 홀로 방황하며 망설였던 날들은 이제 날려 보냅니다. 궤도로 진입했으니 주저함은 떨치고 당차게 시조의 길을 갈고 닦겠습니다. 길목에서 손잡아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 고맙습니다. 바르게 시조를 지켜내는 시인으로 보답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재촉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부족한 맏딸을 끝까지 믿어주신 어머니, 아버지께 온 마음을 바칩니다. 매운 가르침 뒤에 늘 따스한 격려를 잊지 않으셨던 이승은 선생님께도 금싸라기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그리고 ‘좁아진 시야’ 가운데에서도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그 친구가 참말 고맙습니다.

이제, 새해 햇귀에 시조의 오늘을 얹으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심사평…의학·과학 용어 도입…상징·은유로 집약

 

시조는 정형률을 가지고 있으므로 외적 기율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장과 구의 개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밑바탕으로 내용의 축조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응모작들이 형식에 갇혀 자신의 생각을 개성적으로 풀어내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오랜 절차탁마로 극복할 길 밖에는 없다.  

으뜸의 자리에 오른 이나영 씨는 장래가 촉망된다. 당선작 '흑점'이 그것을 잘 말해줄 뿐만 아니라 같이 보내온 세 편의 탄탄하고 참신한 작품들이 그 점을 넉넉히 뒷받침해준다. '십자드라이버' '스물의 자취' '별똥별'이다.

두 수로 직조된 '흑점'은 은유의 깊이와 폭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전문적인 의학`과학 용어가 시어로 도입되어 효과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흑점이 폭발하면 지구의 기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어지럼증’을 안기는 셈이다. 흡사 몰래 자라고 있는 머릿속 ‘뇌하수체 꽈리’처럼.

흑점 폭발로 태양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이온화된 고온의 가스로 구성된 태양 대기의 가장 바깥 영역인 ‘코로나’는 움츠러든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도 ‘코로나’처럼 정상적인 궤도를 이탈하려는 존재가 있다. 궤도를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 줄로만 여기는 기성세대의 눈길로 볼 때 ‘오리무중’으로 일탈하는, 일탈을 감행하는 요즘 청소년들이 몹시 불안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당선작 '흑점'은 그런 시각을 바탕으로 시조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중층구조의 상징과 은유로 집약화한 결실이다. 즉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새로운 발화로 생명의 존엄과 생태계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명징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것은 신인으로서 신뢰가 가는 강점이다. 그 점을 높이 산다.

최종까지 오른 용창선, 이한, 안은주, 박경화, 후인영, 김광희 제씨들의 응모작들도 공정의 깊이를 보였지만 당선에 이르기까지는 몇 가지 미흡한 점이 있어 다음 기회로 밀렸음을 밝힌다.

당선된 이나 결승선 직전에 주춤하게 된 이들 모두 가일층의 분발을 빈다. 이 궁핍한 시대에서 시조 쓰기란 우리 삶을 보다 윤택게 하고, 개개인의 내적 품격에 꽃 이슬을 얹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정환 (시조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