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영남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코타키나발루의 봄 / 이수정
<당선작>
코타키나발루의 봄 / 이수정
일련번호: 27
날짜: 10월 9일
이름: 배춘자
나이: ?
메모: 황 여사 소개
배춘자 씨가 전망대 통유리창 너머로 고개 돌리는 걸 보면서 나는 휴대폰으로 타이머를 맞춘다. 15분. 노인들은 타이머를 싫어한다. 말하는 도중에 어디선가 자꾸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조바심 난다며. 오금이 근질거린다고, 좀 민망한 표현을 쓴 노인도 있다. 타이머를 끄면 또, 시간이 얼마나 남았냐고 수시로 물을 거면서. 초반에는 대개 나에 관해 묻는다. 나이며 이것저것. 젊은 애들과 달리, 노인들은 말을 붙여놓고 머릿속으로 다음에 할 말을 고르는 기색은 아니다.
스물세 살, 대학생이고요. 아버지는 우체국 다니고 어머니는 살림하세요. 친가고 외가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오래전에 전부 돌아가셔서 얼굴도 잘 몰라요. 언니는 결혼했고, 오빠는 군대 갔어요.
물론,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사실대로 말했다. 스물다섯 살, 대학은 다닌 적 없고, 아버지는 내가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곳에 있지만 내가 잘 찾아가지 않고, 엄마는 손바닥만 한 가게에서 종일 웅크린 채 밀가루 음식을 만들어 돈을 벌고, 친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남은 두 친할머니는 의좋은 척 한집에 살고, 외가 쪽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가 고아로 자라 전혀 모르고. 내게는 언니도 오빠도 없다.
그러자 노인들에게서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젊은 애가 어째 노인보다 곡절이 더 많으냐며. 물어서 대답한 것뿐인데 시간이 다 되자 낯빛을 바꾸며 환불해 달란 노인이 나섰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값을 치르는 건데 거꾸로 내 이야기만 들었다고. 환불해 주면서 좀 억울했다. 돈은 돌려줬는데 내 이야기는 돌려받지 못했으니까. 그때부터 각본이 필요해졌다.
배춘자 씨는 나에 관해 묻지 않는다.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할머니라 하지 말고 배춘자 씨, 하고 이름을 불러줘요. 첫마디를 그리 열었다. 네네. 늙은이 옆집해 줘 고마워요. 네네. 이곳에서는 옆에 앉은 사람을 그리 부른다. 옆집. 사람더러 집이라고. 돈 받고 하는 건데요, 뭘. 그래도요, 늙은이하고 한 마디라도 섞어주는 게 어딘데요. 네네. 통유리창 너머로 비행기 한 대가 막 내려앉을 참이다.
배춘자 씨는 비행기, 타 보셨나요.
이곳에서 말 트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물음도 없다. 바로 눈앞에 비행기가 있으니까. 창밖에 시선을 붙박은 채 배춘자 씨가 안 타봤어요, 한다. 이제껏 만난 노인들과 배춘자 씨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손주뻘인 내게 꼬박꼬박 높임말을 쓰는 것도, 비행기를 못 타 본 게 아니라 안 타봤다 하는 것도 그렇고. 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붙이고 배춘자 씨의 입술을 쳐다본다. 마치, 앞으로 15분 동안 열과 성을 다해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배춘자 씨가 비행기를 못 타 본 게 아니라 안 타 봤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전 배춘자 씨의 옆집이었던 배선봉 씨 때문이다. 배춘자 씨와 배선봉 씨는 성(姓)만 같을 뿐, 남매는커녕 친척도 아니다. 물론, 나하고도 그렇다. 배춘자 씨, 배선봉 씨, 나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이다. 비행기를 타 봤냐는 물음에 배선봉 씨가 못 타 본 게 아니라 안 타봤다고 대답할 때, 배춘자 씨는 배선봉 씨가 자존심이 아주 강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
(타이머 멈춤)
형사는 이쪽 의사를 묻거나 승낙을 구하지도 않고 녹음기 앱의 버튼을 누른다. 형사나 경찰 앞에서 지은 죄 없이 주눅 드는 사람에겐 당연해 보일 수 있어도 나는 대번에 불쾌해진다. 우리 집이며 엄마 가게를 뻔질나게 찾아와 뭉개던 형사들은 음식을 시켜 먹고 돈을 안 낼 때가 더 많았다. 심지어는 어린 내게 라면을 끓여달란 적도 두어 번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 있는 곳을 엄마와 내가 알면서 모른 척한다고 믿었다.
물론, 그 믿음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마에 뜨거운 입김이 닿아 얼핏 잠 깬 밤, 자는 척해야 할 것 같아서 눈은 안 떴지만, 나는 엄마에게 익천(翼川)이란 지명을 반복해서 말하는 아버지 목소리를 들었다. 여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에 앞서, 형사를 노려보던 엄마의 상기된 얼굴이 떠오른다. 스테인리스 대접에 얼굴을 박고서 잔치국수를 세상없이 맛나게 처먹는 형사를 향해 엄마는 내가 하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하듯 말했다.
아버지는 참다 참다 이제 더는 못 참게 된 사람들을 돕는 것뿐이야.
이곳 여느 노인들처럼 형사도 내 이름과 나이부터 묻는다. 물론, 이번에는 내가 진짜 이름과 나이를 댄다. 형사가 학생이냐고 묻는다. 젊은 애들은 모두 학생일 거란 지겨운 착각. 학생 아닌데요, 할 때마다 죄 없이 죄짓는 기분이 되는 게 싫다. 웬 젊은 애 하나가 노인들 이야기를 들어준답시고 돈 뜯어 간다는 신고라도 들어갔나. 먼저 달라 그런 거 아닌데요, 정자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을 뿐인데요, 들어달라니 듣고 주겠다니 받은 것뿐인데요. 그리 말하려 목구멍에 힘을 주는데 벨 소리 울리는 전화기를 윗옷 주머니에서 꺼내며 형사가 묻는다.
학생은 배선봉 씨를 아나요?
학생 아니라니까요, 하는 뜻으로 고개를 젓는데 그게 형사 눈에는 배선봉 씨를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비친다. 배춘자 씨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을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배선봉 씨를 안다고 하기에는 아는 게 너무 없고, 모른다고 하기에는 또 아는 게 좀 있는데. 화장실에 갔다가 양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다가든 배춘자 씨에게 형사가 신분증을 들이민다. 배춘자 씨가 눈의 초점을 맞추려 오만상을 찡그린다. 사나흘 옆집 사이였던 배선봉 씨가 일주일째 연락이 안 돼 가족들이 찾고 있다는 말에 배춘자 씨 표정이 묘해진다. 눈이 치떠진 건 놀라서 그런 것 같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즐거워서 그런 것 같은.
지난 두 달간, 배선봉 씨가 날마다 집을 나서 공항에 온 사실을 가족 누구도 알지 못해 형사는 여기까지 오는 데 애를 먹었다. 형사는 주변 탐문을 통해 공항 전철 역내 약국의 약사가 배선봉 씨를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정황을 알아냈다. 배선봉 씨는 공항 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늘 자양강장제 한 병을 사 마셨다.
배선봉 씨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약사가 아니라 사실은 당신이란 사실에 자못 뿌듯해하던 배춘자 씨는 연락처를 받은 게 있는지 묻는 형사에게 돌연 눈을 흘긴다. 혹여 돈 냄새를 맡고 배선봉 씨에게 여자라도 들러붙을까 후레자식들이 통화 기록을 대놓고 뒤진다는데 연락처를 어찌 나눴겠냐며 애먼 형사에게 언성을 높인다.
돈 냄새 나는 노인으로 잘 잡아 봐. 외국에선 식당에서 접시 나르다 노인네 말 좀 들어줬다고 팁으로 천만 원짜리 수표도 받고 그래. 혹시 알아? 네 운이 여기서 트일지.
며칠 전, 날 찾아온 J가 전혀 농 같지 않은 투로 말했다. 난 오 분에 천 원이야.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랑 나랑 안 맞는 거야. 그 말은 했다.
배춘자 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형사가 자꾸 코를 킁킁거리거나 주변을 둘러본다. 그럴 만도 한 게, 사나흘이나 옆집 사이였으면서 배춘자 씨는 배선봉 씨에 관해 나만큼이나 아는 게 없어 보인다. 한술 더 떠, 배춘자 씨는 형사가 묻는 말에 대답하기보다 형사에게 묻는 때가 더 많다. 배선봉 씨가 어디 사는지, 자식은 몇인지, 젊었을 때는 뭘 하고 살았는지, 물었던 걸 또 묻기도 한다. 배선봉 씨에게서 들었는데 까먹었다고 할 때 배춘자 씨는 빵을 훔쳐먹다 들킨 어린애처럼 낯빛을 붉힌다. 배춘자 씨의 질문에 대답하다 지친 형사가 녹음 앱을 끄고 일어서며 그래도 그냥 가긴 좀 아쉽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배선봉 씨가 갈 만한 곳이 어딘지…, 잘 모르시죠?
*
그렇다고 배춘자 씨가 배선봉 씨에 관해 아주 모르는 건 아니다. 여기서 비행기 타봤느냐는 물음이 말문 트기에 가장 적절하다면, 비행기를 타 본 적 없다고 대답하는 사람과 말을 이어가기에 또 더없이 적절한 질문이 있다. 배춘자 씨는 배선봉 씨에게 그걸 물었던 때를 또렷이 기억한다.
혹시 비행기를 탄다면 가고 싶은 곳이 어딘가요?
요즘 세상에 비행기 한 번 안 타 본 사람 있을까 싶겠지만 노인 중에는 좀 있다. 안 타 보고 타봤다고 하는 사람까지 합치면 꽤 있다고 봐야 한다. 비행기를 탄다면 어딜 가고 싶은지 물을 때 배춘자 씨는 배선봉 씨가 당신처럼 정말로 비행기를 한 번도 안 타 본 사람이라고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별다른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노인들의 대답은 뻔했다. 의사 진단서-혹은 동반자-가 있어야만 탈 수 있는 비행기에 요행히 오른들 어딜 가겠소, 기껏해야 황천길이겠지. 피안의 기슭 어쩌고 하며 좀 배운 티 내는 노인도 있었다. 배선봉 씨는 그다지 배운 티 나는 사람은 아니었다.
코타키나발루.
부쩍 귀가 안 들리면서 배춘자 씨는 못 들은 말 되묻기가 세상에서 제일 모양 빠지는 일로 여겨졌다. 되묻지 않기 위해서는 들은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들은 척도 하기 힘든 말이 있는데 배선봉 씨 대답이 딱 그랬다. 남 속도 모르고 조개처럼 맞물려있던 배선봉 씨의 입이 헤 벌어졌다. 거길 생각만 해도 미치게 좋다는 듯. 배춘자 씨는 그 외계어 같은 단어를 한 번 더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배선봉 씨의 푸르스름한 입술을 쳐다보았다.
코가크니별루, 처음엔 나도 그리 외웠수다.
코,가,크,니,별,루.
배춘자 씨가 한 글자씩 짚어 발음할 때마다 장단 맞추듯 배선봉 씨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렇게 처음 마주 본 배선봉 씨 얼굴에서 유독 코가 크게 보여 배춘자 씨는 반사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바람에 다음 말이 분명하게 발음되지 않았다.
그긴 왜 그려는 건데요.
자전거를 타려고요.
(5분 추가)
학생은 그곳을 아나요?
코타키나발루. 나는 그곳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다. 이리된 마당에 여행이나 가자며 J가 줄기차게 입에 올리고 있는 곳이라 안다. 요즘 젊은 애들 사이에서 가을 여행'핫플레이스'라지만, 난 한 번도 가 본 적 없으니 어떤 곳인지는 모르고. 배춘자 씨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열어 검색창에 단어를 찍어 넣는다.
검색어: 코타키나발루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 북서단에 자리한 섬. 푸른 바다와 밀림, 동남아 최고봉 키나발루산이 한데 있는 천혜의 휴양지다. 해안을 따라 눈부신 백사장이 즐비하고, 최고급 리조트가 절경 속의 휴양을 갈망하는 여행자를 유혹한다. 이슬람 국가지만 종교가 자유롭고 다양한 인종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도 흥미롭다.-jisikpedia
내가 읽어주는 내용을 배춘자 씨는 듣는 것 같지 않다. 검지로 허공에 대고 점을 찍으며 뭐라고 웅얼대는 양이 창 너머 비행기 몸통에 가로 박힌 영어 철자를 읊는 것 같다. 노인들은 잘 그런다. 갑자기 어디 딴 세계로 빠져드는 듯 그런다. 늘어진 눈꺼풀에 가려 가뜩이나 작아진 눈동자가 매직아이 그림을 보듯 아득해지곤 한다. 신나게 말하다가도 어느 순간, 느닷없이 그런다. 그럴 때 대개, 나는 기다린다. 노인들이 그러는 동안 시간이 멈추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정한 시간을 채우기만 하면 되니까.
타이머로 33초가 지나는 지점에서 내가 배춘자 씨의 팔꿈치를 살짝 건드린다. 배선봉 씨가 비행기를 탄다면 코타키나발루에 가 자전거를 타고 싶댔다고 짚어준다. 배선봉 씨가 왜 하필 거기서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지 나도 조금은 궁금해서.
거긴 길거리에 자전거 타는 사람이 없다지요.
설마. 말레이시아 같은 동남아엔 발에 차이는 게 자전거일 텐데. 내가 검색창에 다시 단어를 찍어 넣는다. 학생, 그거 들여다보는 시간은 빼주는 거지요. 아, 뭐, 네네.
검색어: 코타키나발루+자전거+없다
코타키나발루에는 동남아시아 다른 나라와 달리 거리에 자전거가 전혀 없다. 날이 덥기도 하지만 산유국이라 기름값이 싸고 자동차를 나라에서 2~3년간 무이자로 융자해 사게 해주는 덕에 다 자가용을 타고 다닌다.-jisikpedia
배춘자 씨가 듣고도 기억 못하는, 혹은 배선봉 씨가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어떤 날, 어떤 경로로 배선봉 씨는 코타키나발루 길거리에 자전거 타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대번에 배선봉 씨는 코타키나발루 길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당신의 이름처럼 선봉이 되기 위해서였다. 배선봉 씨는 구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어디에서건 무엇에서건 선봉이 돼 본 적이 없었다. 배선봉 씨를 아는 사람들은 배선봉 씨가 이름처럼 선봉이 아닌 것을 조롱하고 비난했다. 배선봉 씨는 자신의 이름이 선봉이 아니었다면 그런 대접을 받지 않거나 덜 받았을 거라 여겼다.
이름값 못한다는 이유로 받아온 설움을 토로하려 배선봉 씨가 입술을 달싹이는데 배춘자 씨가 이름 이야기가 났으니 말인데요, 하며 말을 챘다. 우리 아버지가 날마다 봄날 같으라고 내 이름을 춘자라고 지었대요. 아, 그랬군요. 배선봉 씨가 좀 전에 못다 한 말을 이으려는데 배춘자 씨가 또 말을 챘다. 자전거 이야기가 나서 말인데요, 아버지가 오빠하고 남동생들한테만 자전거 타기를 가르쳐 줬어요, 날마다 봄날처럼 살라면서 우리 아버지는 어째 자전거도 안 가르쳐 줬을까요. 배선봉 씨는 배춘자 씨가 말끝에 울먹일 정도로 설움에 북받치자 조금 전 당신의 설움을 그만, 잊어 버렸다.
나 역시 자전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아버지한테서 자전거를 배웠다고 말할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몇 년 만에 나타난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왔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가르쳐 주마 할 때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던 건 비단 오랜만에 본 아버지가 서먹해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자전거를 타는 정도가 아니라 핸들을 안 잡고도 균형을 잡을 줄 아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에게 뒤를 붙잡힌 자전거는 무거워 잘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 등짝에 대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넘어지려는 쪽으로 핸들을 돌려. 자전거를 못 타는 척하느라 낑낑대면서 뭐가 좋다고 나는 실실 웃음이 샜다.
등 쪽에서 다급한 휴대전화 벨 소리가 나더니 뒤가 가뿐해졌고, 나는 아버지가 손을 놓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홀연, 흔해 빠진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던 아이가 문득 뒤돌아보면 자전거 뒤를 붙잡고 있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저만치서 양팔을 들고 환호하는…. 그걸 따라 할 요량으로 나는 최대한 뒤뚱거리며 자전거를 조금 더 몰다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치켜들고 있어야 할 아버지의 양팔은 형사에게 붙들려 있었다. 아버지 손목에 채워진 쇠고랑이 봄 햇살을 받아 속절없이 반짝였다. 나는 눈물이 솟구칠 정도로 부아가 났다. 엉터리. 날마다 봄 햇살처럼 웃고 살라며.
그때를 생각하느라 내가 매직아이 보는 눈이 되어 있는 동안에도 배춘자 씨 입술은 쉼 없이 움직인다. 얼핏, 말을 멈춘 배춘자 씨가 옆눈으로 나를 본다. 방금 내게 뭔가 물었다는 뜻이다. 물론,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 이럴 때는 되물으면 된다. 배선봉 씨 갈 만한 곳에 관해 형사가 물을 때 왜 코타키나발루 이야기는 안 하셨어요? 과연, 배춘자 씨는 방금 내게 뭘 물었는지 깡그리 잊을 만치 화들짝 놀란다.
아까 그이가 아들이 아니라 형사요?
*
처음에는 나비인가 싶다. 하얗고 가볍고 날개 달린 무언가가 공중에서 나선형을 그리며 배춘자 씨 무릎 위로 내려앉는다. 접은 이음매가 말끔하지 않은 종이비행기. 빨간 멜빵바지를 입은 어린애가 우리 쪽과 저만치 할머니인 듯한 노인을 번갈아본다. 배춘자 씨가 아이더러 오라고 손짓한다. 아이가 한걸음 물러나며 애먼 나를 쳐다본다.
배춘자 씨가 아이 손을 잡아 끌어당긴다. 아이가 엉거주춤 당겨온다. 배춘자 씨가 먼지 묻어 시커먼 아이의 손바닥을 털다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아이 손을 마디마디 닦는다. 학생, 시간 재는 거 스톱, 스톱. 네네. 배춘자 씨가 홍보물 거치대로 팔을 뻗어 책자 하나를 집는다. 거기서 한 면을 찢더니 눈 깜짝하는 새 아이 것에 비교도 안 되게 말끔한 종이비행기 하나를 접어낸다. 배춘자 씨가 그걸 아이 손바닥 위에 올려준다. 아이는 분홍색 혀를 있는 대로 빼서 한 바퀴 돌리더니 깨금발로 뛰어간다.
아이 뒤통수 너머로 아이 할머니를 보며 배춘자 씨가 혀를 끌끌 찬다. 저이도 나처럼 할마인가 보네. 학생은 할마 알아요? 네네, 할머니엄마 아닌가요. 몸을 돌려 창을 마주하고 똑바로 앉은 배춘자 씨가 창밖을 멀리 보며 무릎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낀다. 참아야 하던 시절의 참았던 이야기를 꺼낼 때 노인들은 잘 이런다. 참아야 하던 시절, 배춘자 씨는 삼 남매가 있어 참을 수 있었다. 배춘자 씨는 참으며 죽을힘 다해 삼 남매를 키웠다. 잘 자란 삼 남매는 사회에 나가 돈을 벌어오기 시작했고 줄줄이 아이를 낳았다. 자식들은 직장보다 배춘자 씨 집 가까이 살기를 원했다. 아이들을 맡기기 위해서.
참아야 하던 시절, 배춘자 씨에게 참을 수 있는 이유가 되어 준 삼 남매는 이제 배춘자 씨가 참아야 할 대상이 되었다. 배춘자 씨는 또 참으며 죽을힘 다해 일곱 손주를 키웠다. 배춘자 씨에게 더는 아이들을 맡기지 않아도 되면서 삼 남매는 도심 가까이 이사하며 멀어져갔다. 큰손주가 아기를 낳아 증손주가 생긴 배춘자 씨는 참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당신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었다. 장남 환갑에 맞춰 삼 남매와 손주들이 함께 비행기 타고 어디로 놀러 간다고 할 때까지도 그랬다. 놀러 가는 일주일 동안 증손주를 좀 봐달라고 할 때까지도 그랬다. 아기가 순해서 손 갈 것 하나 없다는 별말 아닌 말에 더는 참지 못하게 된 배춘자 씨가 삼 남매를 모아놓고 소리쳤다.
내 인생이 이제사 봄날인데! 이 우라질 눔들아.
*
일련번호: 31
날짜: 10월 10일
이름: 배춘자
나이: 1939년생
메모: 날마다 봄날 같으라고, 춘자
평상(노인들이 이리 부르는)에 다리 뻗고 앉아 태블릿으로 좀 더 가까워진 그랜드 캐니언(A Bigger Grand Canyon)을 보는데 배춘자 씨가 다가온다. 그림 볼 때면 잘 그렇듯, 나는 느끼지 못한다. 배춘자 씨가 바로 옆에서 그림을 들여다봐도 모른다. 그림을 천 원짜리 지폐 석 장이 덮고야 안다. 오늘도 15분. 네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왁자하니 웃는 노인 네댓 중 손 들어 인사해 오는 이가 있다.
정자에 드러누워 마냥 자던 내게, 대가를 치를 테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며 제일 먼저 다가왔던 황 여사. 그럴 기력도 없을뿐더러 이야기 좀 나누는 걸로 사례를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젊은 애랑 말 섞으면서 죄짓는 심정이 안 되려면 돈이라도 줘야겠다는 말에 수락했다.
하긴, 내겐 공짜로 누구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 따윈 없다. 일주일 전만 해도 그게 내 직업이었으니까. 학교 졸업 전부터 육 년이나 한 짓이니까. 젊은 애가 공항 한구석에서 이리 잠만 퍼지르고 있는 것도, 더는 그 짓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어서니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대개, 화가 많이 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서다. 이를테면, 교제를 반대하는 애인의 아버지와 극적으로 성사된 통화가 도중에 덜컥 끊겼다는 이유로…. 무능한 놈이 싹수마저 엿 바꿔 먹었냐며 애인의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자 누군가는 그 책임을 내게 물었다. 그래, 어쩌면 난 그걸로 돈을 받으니까. 누군가에게 여긴 휴대폰 이용 서비스 콜센터이니 수리 서비스 센터로 전화를 돌려주겠다고 말할 때만 해도 나는 이달의 베스트 상담사 타이틀에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나는 왜 그때 더는 참지 않기로 작심했던 걸까. 돌아보면 별말도 아닌데. 내가 결혼 못하면 네가 내 인생 책임질 거야? 그 숱한 억지와 쌍욕을 다 삭였으면서 그게 뭐라고 터진 걸까. 오냐 그래, 내가 결혼해주면 될 것 아냐! 도통 기억 안 나는데 내가 그랬다고. 씨바. 그 말도 했다고. 헤드셋을 벗어서 사무실 벽에 액자로 걸린 사훈-인내-을 향해 집어 던지며 그랬다고. 물론, 그건 생각난다. 기분 좋게 생경하던 어떤 느낌까지….
아마도 내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내 몸속에 꽁꽁 갇혀 있었을 무언가가, 몸에 난 구멍이 아닌 살갗을 찢으며 공중으로 흩뿌려지던 느낌. 찢어진 살갗으로 온몸의 피가 빠져나와 발끝을 적시는 느낌. 몸이 가붓해지면서 발이 붕 떠오르는 느낌. 그랬구나. 그게 내 몸의 전부였구나. 내 살과 피는 죄다 씨바로 만들어졌던 거구나. 내 몸을 빠져나온 그것의 힘은 위력적이어서 따라 나오던 팀장도, 팔을 붙잡던 선배도 그 세찬 날갯짓에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낮 밤 따로 없이 집보다 더 길게 머물던 회사를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길거리든 어디든 갈 곳 많고 할 일 많아 뵈는 젊은애들 천지라 나는 후드를 벗을 수 없었다. 노인들이 아침에 집을 나서 뜬금없이 공항으로 향한다는 뉴스는 광화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의 옥외 티브이로 보았다. 노인들과 나는 다를 게 없었다. 젊은 애들 눈치 보여 갈 데가 없다는 점에서.
보던 그게 뭐래요? 불이라도 났나, 천지가 벌겋드만.
내가 내미는 태블릿을 배춘자 씨가 들여다본다. 화가 이름을 알려 주니 배춘자 씨가 눈을 휘둥그레 치뜨더니 그림을 다시 들여다본다. 할매가 그림도 이리 잘 그리네. 남자가 그린 건데요. 남자? 배춘자 씨가 고개를 돌려 황 여사를 찾는다. 그 할매 이름이 뭐랬소? 누구? 왜 있잖우, 백 살도 더 먹었는데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는. 아, 호프너? 왜요? 오늘 아침에 죽었대서?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백사 세 나이로 스카이다이빙에 성공한 호프너 여사와 아무 연관 없을뿐더러 올해 86세로 멀쩡히 살아있다고 말하려는데, 하늘에서 뛰어내린 이가 어쩌다 그새 영영 하늘로 가버렸는지 곡절을 알기 위해 배춘자 씨가 황 여사에게로 움직인다. 학생, 잠깐만 스톱, 스톱. 네네.
저 이는 확실히 배운 사람이요. 영어 말도 아주 잘혀. 난 이제 에이비씨디 배우는데.
그림을 다시 보여 달라는 배춘자 씨에게 내가 태블릿을 건넨다. 미간에 깊은 골이 팰 정도로 그림을 신중하게 들여다보는 배춘자 씨 옆에서 나는 아주 잠깐, 혹시 비행기를 탄다면 어딜 가고 싶으냐고, 배춘자 씨가 물어오길 기대한다. 대답할 말이 있어서. 이 그림을 직접 보러 캔버라에 가고 싶어요. 운 좋으면 고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내가 진짜 학생일 때, 미대 입시생을 제치고 사생대회에서 내가 일등상을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있을지 모르고. 물론, 배춘자 씨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태블릿을 건넨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그렸나.
멀티 앵글이 접목된 작품이라 비행기를 타고 본 정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이 말은 속으로만 한다. 학생, 시간 재요. 네네. 일천구백삼십구년, 목련이 봉오리를 터뜨리는 춘삼월에 내가 태어났어요. 그래서 춘자인 건 아니고요. 날마다 봄날 같으라고 춘자요. 어제 들은 이야기부터, 배춘자 씨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리와 의자 사이에 끼워 둔 휴대폰이 진동하더니 J에게서 온 문자 앞머리가 솟는다. 여행 후보지 중 빨리 하나를 고르라고. 가을 특별 할인 기간이 오늘 끝난다는 말끝에 느낌표가 댓 개는 붙었다. 배춘자 씨가 창밖에 관객을 둔 모노드라마 배우처럼 그쪽을 향해 간간이 손발을 써가며 말하는 동안 나는 J에게 간간이 문자를 찍는다. 코타키나발루에는 길거리에 자전거 타는 사람이 없대. 뭐래. 정말이야, 찾아봤어. 설마. J에게 어제 찾은 링크를 보낸다. 뭐야, 이십 년 전 자료잖아. 잠시 후, 그로부터 이십 년 후의 정보가 담긴 링크가 전송된다.
"죽기 전에 한 번은, 코타키나발루"
코타키나발루에는 해변을 끼고 자전거를 달릴 수 있는 해변 도로가 조성되어 있고, 현지인뿐 아니라 관광객도 자전거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 대여소가 4곳이고 시청에 가면 공짜로도 빌려준다는 사실!-코타키나발루 투어 전문 코코여행사.
배춘자 씨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찾아 꺼내 드는 기척에 나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목을 세운다. 그게 그 냥반이 한 마지막 말이었어요. 그 냥반에 관해 알 리 없는 내가 눈을 끔뻑이자 그걸 어머, 그랬군요, 정도로 이해한 배춘자 씨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수건에다 요란하게 코를 푼다. 이제 배춘자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매직아이 그림을 보는 눈이 되어가는 배춘자 씨를 지켜보다 나는 타이머를 끈다.
*
일련번호: 34
날짜: 10월 12일
이름: 배춘자
나이: 1939년생
메모: 싫어하는 음식이 드물게도, 잔치국수
배춘자 씨가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 그 사이, 나는 와 보라고 손짓하는 황 여사에게 다가간다. 그냥 말해도 배춘자 씨에게 들릴 턱이 없는데 황 여사가 굳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인다. 어제 형사가 다시 와 배선봉 씨를 찾았다고 알려주드만. 자식들이 요양원에 잘 모셨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웃기는 일이재. 그게 어찌 잘 모신 거여, 잘 가둔 거지. 배 여사한테는 말 안 하는 게 좋겠어. 한동안 옆집이었으면서 치매가 깊단 걸 어째 몰랐을꼬. 자식들한테 돈 다 빼 먹히고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것도, 그 냥반이 치매란 것도 알아봐야 뭐 좋겠어. 네네. 참, 어제는 왜 안 왔더랬수, 배 여사가 애타게 찾든데. 아버지한테 다녀왔어요.
배춘자 씨가 통화가 끝났다는 신호로 휴대폰을 들어 흔들어 보인다. 내가 옆으로 가 앉는다. 나는 일천구백삼십구년, 목련꽃 봉오리 터지는 춘삼월에 태어났어요. 그래서 이름이 춘자인 건 아니고요. 날마다 봄날같이 살라고 춘자지요. 이 말을 할 때마다 배춘자 씨가 반달눈이 된다는 걸 나는 오늘에서야 안다. 서로 몸을 완전히 틀어 정면으로 보고 있어서다. 우리 눈이 처음 포개지는 셈이다.
저는 일천구백구십팔년, 칠월 한여름에 태어났어요. 그런데 이름은 봄 햇살처럼 웃으라고…. 하이고, 어매가 더운데 학생 낳느라 고생이 많았것어요. 학생 아니에요. 학생이 아니요? 직장 다니다가 얼마 전에 잘렸어요(씨바). 회사에서 잘렸다고? 네. 이 참한 학생을 왜 자르고 그런댜(우라질 눔들이). 제가 더 참아야 했나 봐요. 참지 말아요, 그래봐야 알아주는 눔 하나 없구먼요.
배춘자 씨가 몸을 고쳐 앉는 동시에 나는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비행기 뜰 시간이 되었다. 배춘자 씨가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배춘자 씨를 내려다본다. 우리 눈이 다시 포개진다. 어제 변호사를 만나고 왔는데요, 이제껏 배춘자 씨가 손주들을 키운 시간과 노동의 대가를 자식들에게 법적으로 청구할 수 있어요. 이 말은 나중에 할 참이다. 여기보다 비행기가 더 잘 보이는 전망대가 있어요. 같이 가실래요. 이 말은 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춘자 씨가 가방을 집어 긴 끈을 몸에 빗금으로 매면서 내 손을 덥석 잡는다.
거기가 어디래요, 학생.
배춘자 씨는 양손을 창유리에 붙인 채 까치발을 한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떨어질 기세지만 나는 못 본 척한다. 유도로에서 막 활주로로 들어서는 비행기 한 대가 보인다. 점차 속도를 높여 활주로를 질주하던 비행기는 더는 갈 곳이 없어 뵈는 지점에서 앞발을 치켜든다. 다리를 접고 날개를 펼친 비행기가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비행기 몸통에 쓰인 글자를 하나하나, 배춘자 씨가 허공에 검지로 짚으며 읊는다.
엠, 에이, 엘, 에이, 와이, 에스, 아이, 에이
맞아요, 코타키나발루로 가는 비행기예요.
*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 바퀴가 단단한 모래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 발에 닿을 듯 파도가 몰려와 부딪으며 거품 올리는 소리. 겁 없이 자전거 뒤에 내려앉은 갈매기가 날갯짓하는 소리. 모래성 쌓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노점 상인들이 낯선 언어로 호객하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귀 아닌 살갗을 파고든다. 내 몸 안으로 기꺼이 들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줄 것처럼.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카수아리나 나무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참이다.
탄중아루 비치를 도는 동안, J는 시청에서 공짜로 빌린 자전거 바퀴가 잘 안 나간다고 내내 툴툴댄다. 한참 뒤에 처진 채, 내가 찾는다는 게 뭔지 알아야 찾는 걸 도와줄 수 있다고 또 소리를 지른다. 내가 찾는 게 뭔지 나도 몰라서 대답하지 못한다. J와 보조를 맞추려 내가 자전거를 세운다.
반대쪽에서 다가드는 자전거 한 대. 자전거 탄 이의 얼굴이 또렷이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내 마음과 다르게 입이 인사를 건넨다. 뜨리마 까시. 뭐가 고맙다는 건지 영문 모르는 눈빛이 내게 와 잠시 박혔다가 지나간다. 자전거는, 벌건 혀를 늘어뜨린 채 씩씩대며 페달을 밟는 J의 옆을 가뿐히 지난다. 아빠 까바르. 현지어를 못 써 안달 난 J가 손 흔들어 인사하자 자전거를 탄 이도 손을 흔든다. 아빠 까바르.
나는 자전거를 아예 돌려세우고 멀어지는 자전거의 뒤를 눈으로 좇는다. J가 옆으로 와 자전거를 세우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저 노인, 백 살도 넘었겠지?
여기 코타키나발루는 내 이름처럼, 봄이다.
*
일련번호:
날짜: 10월 30일
이름: 배춘자
나이: 1939년생
시간:
전화번호: (555)7140-0148
메모: 호크니 그림을 아주 좋아함 〈끝〉
<당선소감>
앞으로 내가 쉼 없이 부를 이름들
소설을 습작하는 어느 지점에서 숙명처럼 깨달아진 게 있다. 소설의 인물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게 아니고, 또 소설의 인물을 전적으로 허구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는…. 적어도 내 경우는 그랬다. 내 소설 속 인물들은 내 안에서 소리 죽여 살고 있지 않았나 싶다. 소설 속 인물을 내가 창조했다면 그 인물에 내 마음부터 앞질러 동요되는, 정말 그럴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입때껏 내가 쓴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을 불러 봐도 안다. 이내 명치 부근이 뻐근해 오니 말이다. 선영, 자경, 무영, 금수, 치수, 병기, 하진, 영수, 소희, 로라, 찰스, 그리고 이번 당선작의 주인공 배선봉씨, 배춘자씨, 봄이…. 모두, 내가 이름을 불러주는 대로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소설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 이들이다.
나는 앞으로 많은 소설을 쓸 것이다. 쉼 없이 쓸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둠 속에 부복한 채 내 손끝이 저 이름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을 생각하면, 쓰지 않는 쪽보다 쓰는 쪽이 비교도 안 되게 수월할 것 같아서다. 그 간곡함을 물리칠 만한 뱃심이 내겐 없다.
영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감사하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이 감격의 총합은 나를 한참 웃돌고도 남는다. 당연하다. 미래에 내게서 이름이 불릴 모든 이들의 그것이 더해졌을 터이니….
고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스무 해 넘게 살았다. 이국에서 고국의 언어로 글을 쓰며 늘 변방을 에둘러 걷는 느낌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고단했지만, 높디높은 벽에도 문은 있었다. 그 문 손수 열고 환영해 주신 심사위원께 허리 숙여 감사드린다.
소설 밖에도 내가 불러줄 이름을 지닌 이들이 있다. 당선작 속 인물과 같은 이름을 지닌 오빠, 이선봉. 언젠가 내 소설 속에서 부르고야 말 이름을 가진 동생, 이대봉. 이제는 불러도 될 이름을 지닌 아버지, 이병표. 내 소설을 가장 먼저 읽어주는 박제철. 곧 소설을 쓸 딸 박지영. 소설을 닮은 아들 박준원. 더불어 쓰는 미주 소설가 문우 선생님들께 사랑을 전한다. 졸작을 늘 응원해 주시는 박덕규 교수님, 조동범 교수님께 감사한다. 나의 스승, 손홍규 소설가께 감사와 존경을 전한다.
내가 쓸 모든 소설의 안과 밖에서 어김없이 살아있을, 김중효. 당신께 이 영예를 바칩니다, 나의 어머니.
● 56세
● 부산 출생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 재미교포(미국 뉴저지 거주)
● 영한 번역작가
<심사평>
우리 시대의 노인과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사뭇 낯설고 엉뚱한 질문
최종심에 넘어온 작품은 '사랑하는 가족 드림' '부진정부작위법' '번트 엄버' '존과 트리니티 클럽' '창백한 풍경' '안녕한 하루' '플라이웨이 파프리카' '코타키나발루의 봄'이었다. 여덟 편의 작품에서 가장 잘 다듬어진 작품은 '창백한 풍경'과 '안녕한 하루'였다.
'안녕한 하루'는 위기에 처한 부부의 섬세한 심리와 구체적 상황 묘사가 돋보였다. '창백한 풍경'은 학교 폭력을 모티프로 삼아 오늘날 우리의 가정과 학교가 처한 '창백한 풍경'을 잘 그려냈다. 이 두 작품이 흠잡을 곳이 가장 적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동시에 신인으로 보여주어야 작가로서의 개성적인 세계와 방법이 희미하다는 사실에도 의견이 일치했다.
'플라이웨이 파프리카'와 '코타키나발루의 봄'은 다소 거칠었지만,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방법과 힘이 뛰어났다. 익룡을 닮은 멸종위기종 '넓적부리 황새'를 키우는 한 남자와 창을 마주한 이웃인 다른 한 남자의 이야기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알레고리로 읽혔다. 새를 너무도 사랑한 남자와 사라진 애인을 그리워하는 남자가 함께 보여주는 것은 애정을 기울이는 일과 애정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소재의 독창성과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애인이 만든 영화와 새의 이야기가 서로 알레고리의 의미망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아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코타키나발루의 봄'은 공항에서 지내며 5분에 천원을 받고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직업이 된 젊은이와 그의 고객인 노인들의 이야기다. 원래 휴대폰 이용 서비스 콜센터의 베스트 상담사였던 '나'는 이제 나의 새 고객인 배춘자씨에게 묻는다. 비행기, 타보셨나요?
'나'는 날마다 공항에 오는 배춘자씨의 옆집 사람 배선봉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못 탄 게 아니라 안 탔다고 대답하는 노인들과 '나'의 대화만큼이나 이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사뭇 낯설고 엉뚱하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노인과 젊은이들의 문제를 이렇게 하나의 서사 안에 쓸어 담는 작가의 뛰어난 힘과 개성이 이 소설이 지닌 다른 여러 허점을 충분히 상쇄할 만큼 중요한 가능성이라고 판단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아쉽게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게 된 응모자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 권지예, 방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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