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현대경제 신춘문예 장편소설 당선작] 민주의 방(房)들 / 한열음
<당선작>
민주의 방(房)들 / 한열음
<줄거리>
모든 인간이 차지하는 최초의 방, 어머니.
늦은 밤, 재실집 문간방에서 민주의 어머니는 동생을 출산한다. 고통을 어머니에게 떠넘긴 아기의 울음소리가 밤을 가른다. 귀신과 박쥐가 주인인 재실집에서 민주는 동생 진주와 함께 방치되어 자라다 일곱 살 되던 해, 산골 오지마을 능바우로 향한다.
능바우로 이사 온 민주네 가족은 마당 넓은 집의 ‘창꼬방’ 한 칸을 빌어 살아간다. 민주는 언니를 따라 산길을 걷고 또 걸어 학교에 다닌다. 가족이 깃든 방 한 칸은 좁지만 능바우 대자연은 광활하다. 민주는 학교에서 글자를 배우고 자연에서 치유와 저항을 익힌다.
주인집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 안채로 이사하는 민주네 가족. 넓은 마당, 넓은 집, 넓은 마루가 다 민주네 가족 차지다. 이른 장마에 논둑이 무너지고, 학교 가는 산길에는 물이 범람한다. 민주 혼자 물살을 헤치며 등교를 감행한다. 아버지에게 매 맞아 죽느니 물에 빠져 죽기를 선택한다. 고비를 넘긴 민주는 물에 빠진 몰골로 학교 수업을 다 듣고 혼자서 질척한 산길을 되돌아온다. 민주를 때릴 구실을 찾지 못한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린다. 민주에게 능바우는 자주 공포가 감도는 칸이다.
중학교 3학년인 언니는 고교진학을 포기, 당했다.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공장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겁도 많고 몸도 약한 언니를 서울에 데려다주고 온 엄마는 부엌 한 칸에 들어앉아 운다.
중학생이 된 민주는 오빠랑 읍내리에 방 한 칸을 빌어 자취한다. 민주는 오빠를 위해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싼다. 김치에 밥만 먹던 민주는 날로 빈혈이 심해진다. 3학년인 오빠는 고교진학을 포기한다. 언니와는 달리 공부하기가 싫어서다. 민주는 하루빨리 오빠가 졸업하고 혼자 방 쓸 날만 기다린다. 드디어 혼자 방을 차지하게 된 민주. 평생 처음 가져보는 혼자만의 칸이다.
겨울이 오고 연탄을 들이지만, 학교만 다녀오면 연탄이 사라진다. 가난한 코너 방 아줌마가 범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민주는 연탄 난방을 포기하고 아침이면 얼음물에 머리를 감는다. 민주의 칸 주인이 바람으로 바뀐다.
중3이 된 민주, 담배 농사를 저지하기 위해 낫 시위를 한다. 결국 아버지는 농사 장려금을 토해내고 담배 농사를 포기한다. 민주는 신이 나서 고입 시험 준비를 하지만 민주네 가정에 불운이 닥친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주는 구로공단의 소녀공이 된다. 사고 후유증으로 아버지는 1년 가까이 몸져누웠다. 구로3공단 유정물산 기숙사 119호실이 이제 민주가 머물 칸이다. 다섯 명의 소녀들이 함께 깃든 칸. 한 칸의 옷장 문을 수직으로 열면 딱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칸이 생긴다. 이 칸이 소녀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사적 공간이다. 등 뒤가 뚫려 있지만, 소녀들은 고향 생각이 나거나 설움이 북받치면 이 칸 안에 들어앉아 속으로 울음을 삼킨다.
새벽 5시 기상. 아침 6시 50분 공장에 출근해 남성복을 만들던 소녀들은 저녁이 되면 산업체 야간 특별학급 학생으로 변신한다. 유정 물산 안에서 민주의 불행은 특별하지 않다. 보편적인 불행 안에서 민주는 다시 힘을 내본다.
산업체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이 여전히 여공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민주는 퇴사를 결심한다. 하지만 퇴사 후 동의서를 받지 못하면 학교도 퇴학이다. 유정물산은 동의서를 써준 적이 없다. 민주는 투쟁한다. 동료들의 인권 보호나 노동권 보호를 위한 투쟁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투쟁이다. 공장도 벗어나고 싶고, 동의서를 받아 고등학교도 무사히 졸업하고 싶다. 두 달을 투쟁한 끝에 민주는 유정물산 최초로 퇴사동의서를 받는 데 성공한다. 민주의 다음 목표는 학교 사환이다.
사환이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엄마가 쓰러진다. 대학 등록을 위해 저축한 돈을 엄마 치료비로 고스란히 빼앗긴 민주는 종교에 의지해 보려고 성경을 구입한다. 하지만 창세기를 읽은 민주는 신神이 모순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가족들 몰래 수능 시험을 치른 민주는 겨울 방학 동안 하루 3개의 일을 하면서 보낸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민주는 그토록 원하던 대학생이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다. 엄마는 수술과 재발을 반복한다. 결국 식물인간이 된 엄마는 안방 한 칸을 차지한 채 저승꽃을 피운다.
마흔 중반의 엄마가 마지막 숨을 내쉰다. 민주는 울 수가 없다. 능바우를 떠난 지 3년 반 만에 고향에 간다. 숨 쉬지 않는 엄마와 함께. 아버지의 조상들이 묻힌 선산에 사람들이 깊은 구덩이를 파고 엄마를 묻는다. 엄마에게는 마지막 한 칸조차 선택할 권리가 없다. 봉분이 오르고 사람들이 무덤의 흙을 다지는 동안 민주는 주체적인 삶을 살겠다고, 자기가 머물 칸은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다짐한다.
고향에 엄마를, 어린 민주 자신을 남겨두고 서울로 돌아간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안방이 텅 빈 것을 본 민주는 비로소 엄마의 부재를 인정하고 이제 막 엄마의 자궁을 빠져나온 갓난아이처럼 목 놓아 운다. 민주는 이제 엄마라는 칸을 나와 세상이라는 칸으로 나아가야 한다. <끝>
<당선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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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소설을 사랑합니다. 소설은 제가 춥고 어두운 방에 머물 때마다 흔쾌히 문을 열고 온기를 허락해 주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창작하겠다고 나서니 소설은 태도를 바꿔 저를 냉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후회했습니다. 쓰지 말걸. 쓰지는 말걸.
그런데도 꾸준히 달래면 언젠가는 다정했던 소설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더 열렬히 구애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스토킹했습니다. 포기하기엔 돌아갈 길이 까마득했습니다. 결국 이번 겨울에도 신문사에 소설을 보내고 연말연시에 걸려 오는 모든 광고 전화를 다 받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선물은 스팸 전화 사이에 숨어 제게 닿았습니다.
이번 소설은 공모전에 제출할 생각으로 쓴 글이 아니었습니다. 유년의 언어를 기록하고, 대한민국이 풍요를 누리던 1990년대에 세상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소녀들을 기억하기 위해 썼습니다. 소설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도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용기 주시고 부족함을 채울 기회를 마련해주신 현대경제신문과 심사위원분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어딘가에 놓인 춥고 어두운 방을 찾아 작은 불씨 하나 밝히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삶을 살겠습니다.
쓰는 내내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며 합평해 주던 문우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승아, 규리, 기태, 성우, 상욱. 그리고 ‘글 빚는 방앗간’의 선생님들. ‘탈퇴금지’ 멤버들. 소동의 문우님들. 대학교와 대학원의 문우님들. 그대들 덕분에 글을 계속 쓰고 고쳤습니다.
오랜 기간 성취 없는 제자를 포기하지 않고 이끌어주신 서울디지털대학교의 김종광 선생님, 손홍규 선생님, 중앙대 대학원의 방현석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감사드릴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저보다 저의 등단을 더 기다린 형제와 조카들, 그리고 대구의 현주와 민형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특히 제 인생에 나타나 행복을 가르쳐준 아름다운 사람 ‘건’,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당선 연락을 받고 하루가 지났습니다. 이제 진짜 소설을 써 보라는, 달콤한 말씀으로 재생합니다. 착각이라면 기꺼이 착각하며 계속 써 보겠습니다.
● 1977년 전북 완주 출생
●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석사 2월 졸업 예정
● 현재, 출판사 편집자로 근무
<심사평>
소설 미학이 돋보이는 신선한 구성으로 삶을 조명한 작품
국내 신문사 주최 신춘문예 공모 행사 가운데 장편소설을 모집하는 곳은 현대경제신문사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소설의 본령이 장편소설이지만, 신문·잡지·출판사에서 장편소설을 수용 발표하기에는 지면 확보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어서 대부분 중편이나 단편소설을 수용한다. 신춘문예 역시 신문에 게재할 수 있는 분량의 단편소설 중심으로 공모하고 있다. 이러한 창작환경에서 장편소설 중흥을 위해 신춘문예에 장편소설을 공모하는 현대경제신문사에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감사 말씀을 드린다.
2024년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에서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장편소설을 숙독하여 「민주의 방(房)들」(김희정, 필명 한열음)을 최종심으로 두고 심도 있게 재숙독한 결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민주의 방(房)들」은 10개의 방(房)으로 나누어 서사를 진행하는데, 소설 미학을 살린 새로운 구성이 돋보인다. 여기에서 방(房)은 생활공간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삶을 변화시키는 여정이며 사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방과 눈에 보이지 않은, 행복하고 안전한 방을 위해 치열하게 삶을 이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현대인의 지난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삶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이 작품은 그런 과정을 소설 미학으로 잘 살려냈다. 복잡하고 부끄럽고 힘든 과정이지만, 결국 우리의 삶은 그것을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일 때 행복으로 환치할 수 있다. 문장 또한 나무랄 데가 없다. 서사 전개에 있어서 몇 군데 아쉬운 부분이 있으나 탄탄한 문장이 이를 극복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서사 구조가 무난한 응모작이 다수 눈에 띄었으나 구성을 받쳐주는 문장이 흠결 없이 탄탄하지 못해 수상작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에 이번 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은 대상 작품만 선정하고 우수작은 따로 선정하지 않았다.
2024년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한 분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당선한 작가에게 축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 : 김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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